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상 파괴주의 (문단 편집) === 이리니의 반동 정책 === 775년 콘스탄티노스 5세가 사망한 뒤 즉위한 [[레온 4세]]는 아버지처럼 성상 파괴주의를 따랐지만 우유부단해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지 못했고 황후 [[이리니]]의 압박으로 성상 파괴 운동의 강도를 줄였다. 그러던 780년 9월 8일 레온 4세가 열병을 앓다가 사망하자, 이리니는 10살짜리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를 황제로 세우고 스스로 섭정이 되어 11년간 동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그녀의 섭정은 거센 반발을 초래했다. 성상 파괴주의가 지배하고 있던 아나톨리아의 군대는 성상 옹호론자인 그녀의 집권에 반발해 폭동을 일으키고 레온의 다섯 동생들 중 장남 [[니키포로스(8세기)|니키포로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 봉기는 곧 진압되었고 주모자들은 처형되었으며 레온의 다섯 동생들은 모두 삭발당하고 강제로 [[성품성사|성직 서품]]을 받았다. 하지만 반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칠리아의 동로마 총독은 독립을 선언했고 782년 아르메니아 장군 타차테스는 이슬람 세력에게 투항했다. 이리니는 이슬람 세력의 압박을 모면하기 위해 향후 3년간 매년 7만 디나르를 바치는 조약에 합의해야 했다. 그러나 이리니는 성상 파괴 운동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784년 세계총대주교에 자신의 전직 비서 타라시오스를 임명했고 785년 8월 29일에 교황 [[하드리아노 1세]]에게 서한을 보내 이전 공의회의 성상 파괴 결론을 뒤집기 위한 새 공의회에 대표단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이리니가 세계총대주교를 자기 사람으로 임명한 것에 유감을 표하면서도 그녀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윽고 786년 8월 17일, 사도 성당에서 로마와 동방의 교구들에서 파견된 주교들이 모였다. 그러자 성상 파괴주의를 따르는 황궁 경비대와 수도 주둔군 소속의 병사들이 성당 안으로 박차고 들어와서 "당장 떠나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고, 주교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쳐 버렸다. 이에 이리니는 폭동을 일으킨 병사들을 사라센 정벌을 단행한다는 명분하에 아시아로 보내고 그 자리에 비티니아 출신의 믿을 만한 병사들로 채웠다. 그후 이리니는 도망쳤던 주교들을 불러모아 787년 9월 니케아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철통같은 경비를 받으며 공의회를 개최했다. 수개월에 걸친 토의 끝에, 공의회는 성상에 대한 적대 행위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성상 파괴를 주장하는 모든 문헌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의 주관하에 압수해야 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이리하여 성상 파괴 운동은 40여 년만에 종식되는 듯했다. 그러나 성상 파괴주의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이리니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에게 기대를 걸었다. 790년 이리니가 자신이 아들보다 지위가 높은 선임 군주로 군림할 것이며 자신의 이름이 황제의 이름보다 먼저 언급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반포하자, 콘스탄티노스는 불만을 품고 어머니를 체포해 시칠리아로 유배보내는 음모에 가담했다. 이리니는 이를 눈치채고 아들을 투옥한 뒤 제국군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군대는 대거 봉기해 감옥에 갇힌 콘스탄티노스를 구출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이리니를 엘레우테리오스 궁전에 감금시켰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이 무능한 황제임을 드러내 지지자들을 실망시켰고 어머니를 섣부르게 사면시키는 바람에 어머니가 반격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말았다. 797년 6월, 이리니는 병사들을 풀어 아들을 습격하게 했고 아들이 가까스로 탈출해 보스포루스를 건너자 사람을 보내 아들을 체포했다. 그리고 8월 15일, 그녀는 포르피리 누각에서 '''아들의 두 눈을 뽑았다.''' 그 후 그녀는 황제를 칭했으며 성상 파괴주의자들을 정계에서 축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